사법부는 무엇을 노리는 것인가? 사법부의 뻔한 수. 반민특위에 사례를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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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10unrY5Ejxc

 

민주당과 정부는 사법부의 뻔한 수를 묵과해서는 안된다.

단호하게 대응하여야 한다.

반민특위의 실패를 기억하자!!

변에 뚜껑을 덮는다고 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25/nwtoday/article/6775387_36807.html

 

박성재·황교안 영장 모두 기각‥수사 차질 우려

내란 가담 혐의를 받는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이 다시 한번 구속을 면했습니다. 법원은 여전히 혐의에 다툼의 여지가 있고,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는데...

imnews.imbc.com

 

결국.. 이 모든 사법부의 짓거리가 희대의 내란과도 상통해서라는 합리적 의심! 
구속 될 다른 놈이 있다는 ... 바퀴가 너무 많아. 바퀴가..


광복 후 친일파 청산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을 통해 시도되었으나, 이승만 정권과 친일 세력의 조직적인 방해로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로 인해 친일파들은 처벌받지 않고 한국 사회의 지배 세력으로 남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 현대사의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 
주요 경과
  • 미군정 시기 (1945~1948): 광복 직후 미군정은 행정 편의와 인재 부족을 이유로 일제 강점기 관리들을 그대로 기용하며 친일파 청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제정 및 반민특위 출범 (1948~1949):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헌국회는 국민적 요구에 따라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이 법에 근거하여 1949년 1월 반민특위를 출범시켰다. 독립운동가 출신 김상덕이 위원장을 맡았다.
  • 반민특위 활동: 반민특위는 친일 기업인 박흥식,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 문학가 이광수 등 주요 친일 인사들을 체포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 이승만 정권 및 친일 세력의 방해:
    •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 활동에 비협조적이었으며, 공소시효 단축을 요구하는 등 방해 공작을 펼쳤다.
    • 친일 세력은 반민특위 위원들을 '빨갱이'로 모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조작하고, 관제 데모와 테러 모의를 일삼았다.
    • 1949년 6월 6일, 무장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특경대원을 무장 해제하고 강제 해산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습격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 반민특위 해체 및 결과: 결국 반민특위는 활동 기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1949년 8월 30일 사실상 무력화되었으며, 1951년 2월 '반민법'이 폐지되면서 친일파를 처벌할 법적 근거가 완전히 사라졌다. 
역사적 평가
광복 후 친일파 청산 실패는 한국 현대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제대로 단죄받지 않은 친일 인사들이 이후 대한민국 사회의 주요 권력층(군, 경찰 등)으로 자리 잡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로 역사와 사회 정의가 왜곡되는 결과를 낳았다. 

https://youtu.be/vQ_seH5PgPY?si=xweVCBVWhjYo3p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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